영화 서울의 봄 개봉일 정보, 출연진, 등장인물, 손익분기점, 실화 12.12 군사반란 사태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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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박정희 시해 사건후 정권 공백기에 벌어진 12.12 군사반란은 일개 소장에 불과했으나 보안사령관이라는 권한으로 핵심 인물로 올라서 있던 전두환과 그의 군내 사조직 하나회가 일으킨 쿠데타로 군권, 정권을 장악하며 한국 민주화를 송두리째 엎어버린 한국 현대사의 암흑기를 알린 사건이다.

전두환은 이후 1980년 5.17 친위 쿠데타를 통하여 본격 권력을 장악하며 광주를 피로 진압하고 대통령에 오르며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호가호위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은 인물이다. 역사의 단죄를 제대로 받지도 않고 사과 한마디 없이 떠난 자로 그 해악이 너무나 큰 인간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을 것 같다. 그가 저지른 많은 죄악 중 12.12 군사 반란은 군내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영달을 위하여 치밀하게 계획했던 사건으로 규정되고 있다. 한국 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전두환이 일으킨 12.12군사반란을 다룬 영화는 없었는데 바로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곧 개봉된다는 소식이 있어 관심을 끌게 한다. 현대사의 어두운 역사를 어떻게 그려낼지 궁금하다.

영화 서울의 봄

영화 서울의 봄 개봉일 정보, 출연진, 등장인물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은 11.22일 개봉될 예정이다. 제목인 서울의 봄은 박정희가 시해된 1979년 10.26부터 다음해인 1980년 5.17일 전두환 군부의 친위 쿠데타까지 잠시나마 이어졌던 한국 민주화 희망이 용솟음치고 있던 기간을 일컫는다. 물론 전두환과 하나회의 야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던 국민들은 결과적으로 헛물을 켠 셈이 되고 만 것인데 이들 일당이 얼마나 치밀하고 무분별하게 정권을 찬탈했는지 당시로서는 속수무책이었으며 당시 아직도 박정희가 남긴 정치 군인들의 위세가 그만큼 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12군사반란을 다룬 서울의 봄의 각본과 연출은 김성수 감독이다. 그가 연출한 작품으로는 ‘태양은 없다’, ‘영어완전정복’, ‘아수라’등이 있다. 비교적 선이 굵은 작품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출연진으로는 황정민(전두광), 정우성(이태신), 이성민(정상호), 박해준(노태건), 김성균(김준엽), 정동환(최한규), 정만식(공수혁), 이준혁, 김의성, 정해인, 박원상 등 주조연급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상영시간은 141분(2시간 21분)이며 관람등급은 12세 이상으로 정해졌다. 총 제작비는 232억원으로 손익분기점은 460만명이다. 실화를 다룬 시대극이자 스릴러가 가미된 드라마 장르이다.

등장인물로 나오는 전두광은 이름에서 유추되듯이 전두환이다. 실존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법적 시비에 연관되지 않기 위하여 그런 것인데 아무튼 이름은 달라도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예고편을 보면 전두환으로 분한 황정민은 바로 그 자체로 보일 만큼 싱크로율이 높다. 맡는 배역마다 최선을 다하는 황정민 배우는 한국 영화의 희망이기도 하다. 이태신 역을 맡은 정우성이 맡은 역할은 전두광에 맞서는 장군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이다. 한국 영화의 대세로 등장하는 두 주연의 연기 대결과 극중 긴장감이 사뭇 기대된다. 실제 인물들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이성민, 노태우는 박해준, 김진기 헌병감역의 김성균, 최규하 역의 정동환, 정병주 소장역의 정만식, 김오랑 소령역의 정해인 등 쟁쟁한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영화 서울의 봄 실화 12.12 군사반란


1979년 12월 12일밤 수도 서울 시내에서 총성이 울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서울 한남동 참모총장 공관에 머무르고 있던 정승화 계엄 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총성으로 전두환 일당이 벌인 군사반란이었다. 전두환은 보안 사령관으로 소장이었으며 그의 하나회 수하들도 다 지휘체계를 뒤엎은 명백한 하극상을 저지른 사건이다. 또한 아무 혐의도 없는 참모총장을 연행하며 대행이긴 하지만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의 재가도 받지 않고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반란이다.

12.12사태로 소개된 반란 사건
12.12군사반란 다음날 중앙청앞
12.12군사반란 상황도

박정희 시해 후 계엄령 하에서 보안 사령관 자리로 수사를 총괄하며 일약 중심으로 떠오른 전두환은 이미 이때부터 본인이 정권을 잡으려고 작정을 했던 것으로 차근차근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했다. 이미 그를 막을 세력은 전무한 상태였다. 대통령 대행인 최규하는 아무런 제어도 못했으며 오직 직속상관인 정승화 참모총장만 경계대상이었던 것인데 이미 정 총장도 전두환의 전횡을 간파하고 그를 내치려 했으나 군내부를 이미 장악한 전두환 세력들이 선수를 쳐서 그를 쫒아내고 몰아내면서 실권을 잡은 사건이 바로 12.12 반란 사건이다. 전두환 일당은 이 반란을 획책하며 1,3,5 공수여단 외, 사단장 노태우가 이끄는 9사단 29연대, 30연대 소속 1개 대대, 30사단의 90연대, 제2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를 동원하며 서울의 중심부 중앙청으로 출동할 것을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최전방을 지켜야 할 군대까지 동원시키는 바람에 심각한 안보 공백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당연히 불법이니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미군에게도 알리지 않고 진행되었다. 반란군과 진압군간에 심각한 유혈충돌이라도 있었으면 그 피해는 누가 입었을 것인지를 생가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반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반란군 측의 핵심 인물은 반란 당시 하나회 핵심인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 수사본부장(소장), 허화평 비서실장 (대령), 허삼수 인사처장 (대령) 수도경비사령부 이진백 인사참모 (대령), 장세동 제30경비단장 (대령),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대령), 육군본부 및 국방부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우경윤 범죄수사단장 (대령), 차규헌 육군 수도군단장 (중장), 황영시 육군 제1군단장 (중장), 박준병 육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노태우 육군 제9보병사단장 (소장), 정호용 육군 제50보병사단장 (소장),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최세창 제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장기오 제5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정동호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준장) 등이다. 반면 이들에 저항하고 맞섰던 진압군 측으로는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김기택 참모장 (준장), 특전사령부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김오랑 특전사령관 부관 (소령), 이순길 부사령관 (준장), 윤흥기 제9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이건영 육군 제3야전군사령관 (중장), 최영구 육군 제5군단장 (중장), 강영식 육군 제6군단장 (중장), 배정도 육군 제26보병사단장 (소장), 손길남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등이 맞서 싸웠다. 반란을 일으켰던 이 자들의 이름을 확실히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대통령이 두명이나 나왔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군사반란 성공이후 기념촬영을 남긴 반란군들
군사반란뒤 강제 연행된 정승화 참모총장
반란군에 맞섰던 장태완 장군

12.12 군사반란을 성공시키고 12월 13일 오후, 강압속에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 사건 연류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또한 구속됐으며, 정승화의 육군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직에 이희성 육군 대장이 임명되었음을 발표하며 사건을 알렸다. 12.12 반란 성공으로 전두환은 본인이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이제 그를 막을 것은 없어 보였다. 10.26으로 전두환은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2.12반란으로 군부를 장악하며 한발 더 다가섰고 5.17 계엄확대를 통하여 촉발된 광주민주화항쟁을 총칼로 제압하며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결국 대통령에 오르게 된 것이다. 12.12반란의 총구가 군 내부를 향한 것이었다면 5.18광주항쟁에서는 민간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수많은 살상을 저지른 것이 다르다. 

10.26이후 보안사령관으로 전면에 나선 전두환
5.18광주민주항쟁 진압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전두환
16년후 법정에 선 죄인들

이와 같이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이 사건은 이듬해 5.17쿠데타로 이어지는 정권 찬탈 과정이며 같은 시기 이어진 민주화의 열망이 가득찼던 서울의 봄과 정반대에 있던 그들에게는 축복의 시기였을 것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서울의 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영화 서울의 봄은 이런 불행한 역사를 일깨워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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